2015. 6. 13. 23:34ㆍkrbs
놀랍게도! 올해 적녹합작에 제출했던 글을 아직도 안 올렸단 소식에
일단 백업삼아 올려보는... 요즘 연성을 안 해서 티스토리에 올릴 게 없음
그건 매우 뜬금없기까지 한 소리였다.
"…지금 뭐라고 했냐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흘러내린 제 안경을 고쳐 썼다. 혹시나, 아주 혹시나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기를 기대했으나 그럴 턱이 없었다. 제 앞에 앉아있는 친우는 느긋한 미소를 지은 채 방금 전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 재생해주었다.
"같이 바다에 가지 않겠어, 미도리마?"
때는 중학교 2학년, 겨울이었다. 정확히는 겨울방학이 시작하는 방학식 날이었다. 방학식도 끝나고, 아오미네나 키세같은 다른 레귤러 멤버들은 일찌감치 신난다며 집으로 돌아가 버린 시간. 미도리마는 썰물처럼 학생이 빠져버린 학교 건물을 걸어 동아리방에 앉아있었다. 평소 농구 연습을 하던 1군 전용 체육관이 아니라, 동아리방. 평소 쓰는 사람이 없어 주말에 문을 열면 가끔 먼지 냄새가 나는 그 동아리방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약속도 없었다. 어느 날부턴가 두 사람만의 불문율처럼 자리잡게 된 장기 대국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조차 조금도 없었다. 그저 습관처럼 천천히 걸어서, 동아리실의 문을 드르륵 열었을 뿐.
그러나 그 너머에서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카시를 본 순간, 미도리마는 자신이 왜 이 곳에 왔는지에 대한 의문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 되어 머릿속에 떠오르지조차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은 대국이었다. 조용한 부실 안에서 시작된 대국은 10분도 되지 않아 한쪽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고, 몰린 쪽이 미도리마라는 사실은 언제나 그래왔기에 놀라울 것도 없었다. 미도리마가 럭키아이템인 오뚜기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대국 중에 수세에 몰리면 보이는 미도리마의 버릇이다. 언제부터 시작한 것인지 이젠 셀 수도 없게 된 대국 중에, 이런 습관을 갖게 된 것은 과연 언제인지, 미도리마는 잘 알 수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이대로 5수 안에 왕이 잡힐 것이 자명한데, 다음 수는 무엇을 내야할까. 아카시는, 지금 자신의 수를 읽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미도리마가 힐끔 아카시를 보았던 그때, 아카시가 한 말이 그것이었다.
—같이 바다에 가자, 고.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지금 미도리마는 바다에 서있었다. 옆에 서있는 것이 아카시 세이쥬로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중학생에 불과한 미도리마와 아카시가 당일치기로 갈 수 있는 바다는 한정되어 있었기에 아무도 없는 프라이빗 비치, 는 아카시의 재력으로도 무리였을 것이다. 무리라기보단 효율적이지 않겠지. 미도리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일치기라고는 해도 해가 빨리 떨어지는 겨울, 이미 어두워진 뒤임에도 바다에는 사람이 꽤 있었다. 늦은 시간, 거세게 부는 바닷바람에 굴하지 않고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곳이 만일 프라이빗 비치였더라면 아무래도 아깝지 않을까. 미도리마답지 않은 감상적인 생각이 들 만큼 겨울바다는 운치있는 곳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는 사람이 많은걸."
아카시는 담담하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다이바에 있는 해변인 만큼 사람이 적은 것이 도리어 무리였다. 밤바다라는 특성상, 대부분이 연인이었다. 팔짱을 끼고 꼬옥 붙어서 해변가를 걷거나 혹은 자그맣게 불꽃놀이를 하는 곳도 보였다. 그 모두가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아카시를 힐끔 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한 표정으로 밤바다를 들여다보는 아카시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이곳에 있는 걸까. 언제나 몇 수 앞을 내다보고 포석을 까는 아카시이다. 갑작스럽기 이를데 없는 바다행은 아카시에겐 그럴듯한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었으나, 범인인 미도리마로써는 그 속에 들어있는 수를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몇초나 흘렀을까, 아카시는 미도리마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조금만 더 보다가 돌아갈까."
아카시의 말은 권유형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가 명령과 다름없다. 그의 말에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같은 것은, 미도리마에겐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그렇기에 막연한 의문 따위는 저 바다 너머로 날려버린 채 미도리마는 대강 시야가 가려지지 않은 모래변을 찾아 그 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하얀 교복이 모래로 더럽혀져 어머니가 고생하실 거란 사실은, 그 나이대 중학생답게 잠시 잊어두기로 했다. 그런 미도리마의 행동을 가만히 보던 아카시는, 저도 답지 않게 미도리마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소 몸에 배어있다시피 한 예의범절 같은 건 어디론가 날려버린 채로.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도착했을 때만 해도 해는 졌어도 어스름한 저녁하늘에는 아직 빛이 남아있던 것을, 넘실거리며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완연한 밤하늘이 되어있었다. 겨울답게 높은 하늘에는 드문드문 별이 반짝이고, 바다는 까맣게 물이 들어 모래를 적셨다가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아카시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바다같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화가 없기 때문일까, 바닷가에 사람들이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고요한 침묵이 그 자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 단 둘만 남아있는 것처럼.
그 침묵은 꽤 어이없이 깨졌다.
훌쩍, 미도리마가 코를 훌쩍였다. 교복 위에 코트를 입고있다곤 하지만 오래도록 바닷바람을 쐬자니 아무래도 추웠다. 운동을 해서 몸이 덥혀진 것도 아니었거니와 가만히 앉아만 있자니 체온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탓이다.
"추운가보네."
아카시가 미도리마를 돌아보며 낮게 웃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 미도리마가 아무런 말도 않은 채 눈동자만 굴렸다. 추운 건 사실이었지만 저와 똑같이 앉아있는 아카시만 멀쩡해보이는 것이 어쩐지 분해서 쓸데없는 오기가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쓸데없이, 춥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아카시는 별달리 대답을 원했던 말이 아니었던지 제 옆에 놓인 가방에 들어있던 목도리를 꺼내어, 미도리마의 목에 매어주었다.
"이 정도면 괜찮을까? 혹시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당황한 미도리마가 아카시의 손을 잡았다.
"응? 무슨 일이야, 미도리마?"
"…뭔가, 이유가 있어서 오자고 한 것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짜내듯, 그제서야 이유를 물었다. 매우 뒤늦은 질문이었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언제나 옳다. 그가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보면 그의 행동은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감히 표하지 못했던 의문을 코 끝이 새빨개지도록 그에게 따르고서야 미도리마는 겨우 입에 담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뱉고나서는 괜히 물었나, 싶어졌지만.
아카시는 눈을 크게 뜬 채, 잠시 미도리마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기 힘든 것을 말해야 하는 것처럼, 다소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역시, 묻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미도리마가 후회하고 있을 때.
"그냥 한번쯤은 미도리마와 바다에 오고싶었어. 특히 겨울의 밤바다."
"……?"
"아마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
의문스러운 미도리마의 표정을 눈치챈 듯 아카시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덧붙힌 말이야말로 더더욱 이해할 수 없어 미도리마의 의문은 더 커질 뿐이었다. 두 번 다시 없을 거라니, 어째서?
"내년에도 같이 보러오자는 것이다. 합숙 일정에 바다를 포함하는 것도 아오미네나 키세라면 기뻐할 거란 것이다."
"…그래, 그러네. 가능하다면 그것도 고려해보자."
아카시는 여전히 쓸쓸해보이는 얼굴로 미소지었다. 마치 그럴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듯한 그 말에, 미도리마가 울컥하여 말을 덧붙였다.
"만약 그게 어렵다 해도 내년 겨울에 또 오잔 것이다. 졸업과 진학으로 바쁘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너와 하루 정도 어울리지 못할 만큼 중요하진 않아."
"……."
"그땐 같이 불꽃놀이도 재밌을 거란 것이야."
"…그래. 그땐 더 따뜻하게 하고 오자."
고집스러운 미도리마의 말에 맞춰 아카시도 대답했다. 그리곤 갈까, 하고 미도리마를 가볍게 잡아 일으켰다. 미도리마는 여전히 조금 불만스러웠지만 순순히 몸을 일으켜 아카시를 따랐다.
네가 잊더라도 내가 반드시, 이 약속을 기억할 것이다. 물론 넌 잊을 리 없을테지만. 같이 겨울 바다든, 여름 바다든 보러오자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말란 것이다. 당장이라도 헤어져버릴 것만 같으니.
어딘가, 불안감이 가슴 속을 가득 메워오는 기분이었다.
"뭐야, 신짱. 왜 그렇게 멍해있어?"
눈 앞에서 몇 번 손을 흔들어보인 타카오가 미도리마에게 물었다. 손을 흔들 때까지만 해도 장난기어린 행동이었지만 목소리엔 걱정이 가득하다. 미도리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이다. 그저 바다를 보고있자니 뭔가가 생각나서 말이다."
"오, 헤어진 여자친구 같은 거?"
"타카오, 조금이라도 진지해질 수는 없냐는 것이다!"
친구의 연애사를 묻는 게 어디가 어떻냐며 타카오가 투덜거리더니 이내 합숙 훈련이 시작되니 빨리 오라며 자리를 비켜 사라졌다. 자리에 혼자 남은 미도리마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슈토쿠 고교 여름방학 합숙이 바닷가일 줄은 짐작도 못했기에 더 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일까.
작년엔 결국 가지 못했던 바다로의 합숙, 그리고… 지키지 못했던 아카시와의 약속이 바다를 보며 뒤늦게 머리를 아른거린다. 결국 아카시는 옳았다. 3학년이 되고나선 개화해버린 재능 탓에 팀은 분열되어 같이 바다에 올 일 따위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너는 이렇게 되리란 것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고집스레 다시 오자고 주장하는 것을 들으며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제 와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친우를 떠올리며 미도리마가 주먹을 꾹 쥐었다. 약속,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반드시 너와 함께 바다를 보러 갈 것이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것이다. 네가 되돌아오면 반드시.
미도리마가 미련없이 돌아섰다. 원래대로 돌아온 아카시와 함께 바다를 보기 위해, 인사를 다할 시간이었다.
옛 친우와 함께 바다를 보기엔 딱 좋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