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 1. 03:23ㆍmist
그리고 시백이 생일은 12월 12일이었다고 하는데...
처음 작성했던 날짜가 분명히 14년도 아닌 13년 12월 12일인데 이게 왜 이제 올라오냐면 글쎄요. 결말만 남겨놓고 1년이 넘게 계속 방치하다가 아까 미완성 조각글 올리는 김에 이건 완성해야 할 거 같아서.
글의 모티프는 보면 아시겠지만 레피님의 시백이 생일용 개인작입니다.
그건 굉장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자신으로써는 드물 정도로.
태성은 자신에게 새삼 놀라고 있었다. 감정에 못 이겨 충동적인 일을 벌이는 것은 태성에겐 그다지 없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 하고 있는 복수도 다분히 감정적인 이유이긴 했지만, 그는 한번 마음먹은 것을 위해선 다른 모든 것을 내던지는 타입이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12월 12일.
오늘은 양시백의 생일이다.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태성은 경찰에서 나오기 전에 사건과 관련된 사람의 리스트를 뽑아 정보를 정리한 적이 있었고, 그 안에는 당연히 양시백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땐 달과 일의 숫자가 같아 드물구나 싶었는데 그 때문인지 기억에 남아버렸다. 복수를 위해 지하세계로 숨어들고, 정보를 모으며 하루하루 달력의 날짜는 바뀌어 갔지만 조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태성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양지 태권도장은 아직 영업 중인 건지 불이 켜져 있었다. 추위 속에서 태성은 잠시 생각했다. 난 여기에 뭘 위해 온 것인가. 시백과 태성은 서로 생일을 축하하며 같이 케이크를 나눠먹거나 밥을 먹을 만큼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도리어 태성은 시백이 사건 당일에도, 그리고 지금도 자신을 말리려 드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역시 사람이 좋기 때문일까? 평소 방해자에 가깝게 생각했던 시백의 생일이 잊혀지지 않는 것도 수수께끼였다. 선물이라고 하긴 뭐했지만 자그마한 케이크까지 사들고 자신은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5분여간 태권도장을 바라보며 망설이던 태성이 뒤를 돌았다. 자신답지 않은 일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서 더 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발을 떼었을 때였다.
“하태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하게도 시백의 목소리였다. 도장에서 누가 나오는 것은 못 느꼈는데 어째서. 태성이 당황하며 돌아보았다. 시백은 붕어빵이 들어있는 봉투를 든 채로 놀란 얼굴로 태성을 보고 있었다. 가볍게 산책이라도 하고 온 것인지 차림도 도복이 아니었다. 한동안 둘 다 당황한 채로 시선만이 오고 갔다. 결국 태성이 먼저 시선을 피했을 때였다.
“너 여긴 어쩐 일이야? 저녁은 먹었냐? 아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도장에라도 들어오지 그래. 오늘 춥다. 눈도 내렸고. 아, 맞다. 이거라도 먹을래?”
여전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시백은 불쑥 품 안의 붕어빵을 내밀었다. 막 산 것인지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을 물끄럼히 보던 태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만 가보죠. 붕어빵은 시백씨나 많이 드십시오.”
어쩐지 빈정거리는 어투가 되고 말았다. 태성이 가볍게 눈썹을 찡그렸다. 머리가 살짝 지끈거리는 듯 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시백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건지 그리 기분상한 얼굴이 아니었다.
"야, 가긴 어딜 간다고. 지금 눈이 많이 와서 말이 아니예요. 그대로 가다가 미끄러진다 너. 그냥 하루 자고 갈래? 아, 도장이 좀 따뜻하진 않은데 남자니까 그 정도는 괜찮지?"
기가 막힌 제안이었다. 언제부터 태성과 시백이 하루 자고 갈 만큼 친밀한 사이였단 말인가. 태성이 손을 내저었다. 다시 한 번 거절할 셈이었다.
"그런데 너 손에 그 상자는 다 뭐냐?"
시백이 의아한 듯 질문했다. 작은 상자는 곧 크리스마스여서 그런지 빨간 색에 눈 무늬가 들어간 것이 유치하고 귀여웠다. 아무리 봐도 태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박스였다. 태성도 그걸 의식한 건지 조금 주춤하며 상자를 뒤로 감추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긴 무슨. 그거 케이크 아냐? 딱 봐도 그건데 뭘. 아, 혹시 하태성씨 여친이 있었나? 근데 크리스마스는 다다음주야. 정신차려."
시백이 가볍게 웃었다.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건 전혀 떠올리지 못하는 눈치였다. 거기에 더해서 이 케이크가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하태성 본인도 양시백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를 산 것이 뜻밖이었기 때문에 시백이 눈치 못 챌 만도 했다.
이왕 산 것이니, 본인에게 전해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닙니다. 이건 양시백씨에게 줄 생각이었습니다."
태성이 손을 뻗어 케이크를 시백에게 내밀었다. 앞머리로 덮인 시백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엉? 케이크를 나한테 준다고? 니가? 나한테?"
시백은 케이크 상자와 태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상당히 혼란스러워하는 게, 본인의 생일도 잊은 것이 분명했다. 한숨어린 목소리로 태성이 입을 열었다.
"오늘이 생일이죠. 축하합니다, 양시백씨."
시백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무언가 세어보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이내 어쩔 줄 몰라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야, 그… 고맙다. 이건 잘 먹을게."
그리곤 태성의 손에 들린 상자를 홱 빼앗았다. 동시에 다른 손으로 거칠게 붕어빵 봉투를 내밀었다.
"양시백씨, 이건 됐다고 아까부터…"
"됐고, 일단 들어."
먹으라는 뜻이 아닌 모양이다. 왜 선물을 주고 짐꾼이 되는지 모르겠군요. 태성이 가볍게 투덜거리며 붕어빵을 들었다. 이상하게 시백의 앞에 서면 자꾸 어린아이처럼 투정하는 기분이었다. 묘한 기분에 입을 다물었던 태성의 입이 다시 살짝 벌어졌다.
"…아."
입김이 새하얗게 퍼졌다. 시백이 태성의 빈 오른손을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설마 이 케이크를 혼자 먹으라곤 안 하겠지, 하태성. 같이 가자고."
잡힌 손의 온도가, 걸려온 말이 눈물나게 따뜻했다. 분명히 그래서. 이젠 더는 없는 두 사람이 떠올라서. 거절해야 하는데, 이 남자와 더 엮이면 안 된다고 알고 있는데도 거절하지 못하는 건 그래서라고 자기합리화하면서. 태성은 시백에게 손을 잡힌 채로 어정쩡하게 걷기 시작했다. 도장에 들어가기까지의 짧은 순간은 겨울밤의 침묵 속에 한없이 길었다. 마치 끝이 없는 영원같은 순간이었다. 곧 놓아버릴 손이라 해도 지금만은 이렇게 계속 잡고만 싶었다.
시백은 도장 앞에 도착하자 입을 조금 삐죽이더니 이내 손을 놓았다. 추워서일까, 불빛 아래 비친 그의 얼굴이 붉었다. 허둥거리며 열쇠를 찾는 시백을 태성이 제지했다.
"됐습니다. 전 돌아갈 겁니다. 케이크는… 다음 기회에. 좋은 하루 보내시죠."
손이 놓이는 순간 환상에서 깨어난 양 태성은 덤덤하게 말했다. 시백의 얼굴을 차마 볼 기분이 나지 않아 눈을 피한 채로 붕어빵 봉투를 억지로 그에게 들려주었다.
"어, 야! 하태성!!!"
시백이 망연하게 소리쳤지만 태성은 조금씩 뒷걸음치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 나갔다. 도망쳤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태성은 이대로 더 그의 곧은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계속 시백이 쫓아오지 않을 만큼 멀리까지 뛰어서야 눈길에 미끄러지듯 넘어졌다. 하하. 태성이 허탈하게 웃었다.
"하태성씨. 낙법을 배우는 이유가 뭔지 알아?"
"관장님은 잘 떨어지는 법을 알아야 다시 빠르게 일어설 수 있다고 하셨어."
"당신은 경찰이잖아. 그런 놈들과 어울려 손을 더럽히면 안 되는 거잖아."
옆에서 들려오듯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태성은 그것이 실제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눈앞에 시백이 있는 양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건 당신이 강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문득 백석빌딩 지하에 갇혔던 그 날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지금이라면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놓쳐버린 동료와 어머니를, 구할 수 있을까? 답은 너무나 어려워서 태성은 눈을 감아버렸다.
"아니, 너도 가능해."
기적처럼 대답이 돌아왔다. 태성이 눈을 떴다. 어째서. 넘어진 태성의 머리맡에 서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시백이었다. 괜찮아? 시백이 태성에게 손을 뻗었다. 손을 쳐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태성은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맞잡았다. 장갑도 끼지 않은 시백의 손은 차가웠고, 자신을 찾아 일부러 뛰어나온 걸 잘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태성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시백은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기…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고."
"케이크도 너무 많고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 선물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렇게 말하며 태성의 눈치를 살피는 시백은 어릴 때 키웠던 덩치 큰 개를 연상시켰다. 사나운 눈매, 큰 키와 도복에 어울리는 덩치, 그리고 완력까지. 시백의 외관적인 특징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순간 태성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래, 양시백이라는 사람은 본디 이런 사람이었다. 따뜻하고, 정이 많고, 서투른 사람이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그 사람의 빛이, 제게로 올곧게 닿아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무서워서. 줄곧 그를 피해왔을 뿐이라는 걸 태성은 뒤늦게 자각했다. 그럼에도 이 곳에 온 것은, 결국 자신에겐 이 작은 온기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시백이 얼빠진 얼굴로 태성을 보고 있자니, 태성이 답했다.
"갑시다."
"…엉?"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태성은 시백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제가 먼저 도장 쪽으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비록 복수는 끝나지 않았고, 포기할 마음도 없으며, 앞으로도 시백과는 절대 의견이 맞지 않을 것이라 해도 오늘 밤만큼은 환상 속에서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죠, 어머니?
태성은 속으로 그렇게 물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구름에서 벗어난 달이 어머니를 대신해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