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거리며 메모하던 펜이 멈추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객관적으로 돌아보면 하태성이라는 남자는 사랑하기에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단정한 얼굴에, 몸이 탄탄했고, 성격적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직업도 안정적인 공무원이다. 나이도 아직 한창인 28세. 정밀검사를 해봐야 확실해지겠지만 건강에도 별 이상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이 사람 좋아해, 라고 말하면 누구나 아. 하고 납득할 만한 사람까진 아니어도 감정을 부정당하거나, 혹은 이상하다며 비난당할 사람은 아닌 것이다.
하태성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별이, 여자일 때의 이야기다.
건오는 메모지에 흘리듯 적어 넣은 태성의 프로필을 보다가 성별에 몇 번이고 거칠게 줄을 그었다. 아, 대장나리는 역시 남자는 싫으려나. 펜을 입에 문 건오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나를 좋아한다고 웬 놈팽이가 온다면…? 건오는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다면 역시 태성도 건오의 마음을 알게 되면 달가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100% 그럴 것이다. 건오는 태성의 성격을 새삼 되새겨보았다. 둔하고, 고지식하고, 답답한 양반같은 사람이다. 태성을 알게 되고 얼마 안 되어서는 주황과 진지하게 태성의 동정여부로 내기를 해본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둘 다 동정에 걸었기 때문에 내기 승패는 아직 가리지 못했다. …뭐. 동정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성관념 역시 고지식할 것은 빤하지 않은가.
건오는 비니를 더 깊게 눌러쓰며 머리를 긁었다.
“아오….”
왜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서 이 난리람.
좋아하게 된 계기가 뭐냐. 고 묻는다면 건오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냥 물 흐르듯 감정은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위기 속에서 몇 번이고 목숨의 위험을 극복해나가며, 그… 뭐냐. 무슨 효과인지 까먹어버렸지만,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그런 상황에서는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이 길어질수록 건오는 점점 더 자신의 감정에 자신이 없어졌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에잇,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담. 한참 골머리를 썩이던 건오는 결국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던 탓이다.
시간이다.
건오는 갑자기 분주해졌다. 푹 눌러쓴 비니 아래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빗고, 거울을 꼼꼼하게 보며 제 얼굴을 체크했다. 입는 옷은 항상 비슷한 후드 티에 노란 패딩조끼였지만 옷장 안에서 최대한 고르고 골라 입는 것이라는 걸 상대가 알까 몰라. 물론, 모를 것이다. 하태성이라는 남자는 그런 사람이니까.
마음에 드는 비니를 골라 다시 쓰고, 후드 모자까지 뒤집어쓴 채 건오는 휘파람을 불며 집을 나섰다. 좋은 날씨였다. 초겨울의 햇살이라기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한 햇빛 아래, 바람도 그리 불지 않았다. 이 시기에 바랄 수 있는 최상의 날씨였다. 딱 데이트하기에 적절한 날씨일까? 지금부터 만날 사람을 생각해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 건오의 마음속에서 그런 것은 이미 멀리 날아가고 없었다. 공부를 하자는 이유로 도서관에서 만나는 두 청춘이라니, 어딜 보나 훌륭한 데이트잖아? 암, 암.
계기는 사소했다. 박근태 영감에게서 자유로워지게 되면, 검정고시 공부를 봐주겠다는 약속. 지나가듯 했던 그 약속을 태성은 정말 잊지 않았고, 모든 사건이 끝나고 난 일주일 뒤 건오에게 말했다.
‘내일부터는 공부할 책과 함께 나오십시오.’ 라고.
그 뒤부터는 항상 같았다. 오후 3시, 성중서 바로 옆의 성중도서관에서 만나 태성이 1~2시간 정도 건오의 공부를 봐주고 다시 성중서로 돌아간다. 그리고 태성이 퇴근할 때까지 건오가 공부하면서 기다리다가 함께 귀가하는 것이 언제부턴가 그들의 일상이 되어있었다. 태성이 일하는 도중에 어떻게 그렇게 규칙적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긴 했으나(뒷배 봐주는 영감이 새로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건오는 그 모든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기적처럼 주어진 일상이 너무 안온하고 행복해서, 지금 이대로 있을 수 있다면 의문 따윈 가질 필요도 없었다.
건오가 태성에 대한 연심만 자각하지 않았다면, 좀 더 그 안온한 일상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