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작점을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사람들마다 답이 제각각으로 갈릴 문제였다. 첫 만남을 사랑의 시작으로 잡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사람에게 관심이 생겼을 때, 호감이 생겼을 때, 상대방과 이어진 다음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런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 역시 존재할 것이다. 성중서의 하태성 경위는 관심이 없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사랑의 시작점? 그보다도 연애 그 자체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숨 가쁘게 달려온 그의 28년생을 통틀어 사랑이라고 하는 간질간질한 단어는 그저 책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그런 사실에 대해 아무런 감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랑하고 연애하고 행복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언제나 그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물론 태성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결혼도 해야 할 것이고 아이도 낳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먼 미래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태성이 사무적으로 질문했다. 그에 대한 대답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피의자는 간간히 씨이, 라던가 육두문자가 섞인 소리를 내뱉었지만 도통 수사에 협조할 생각을 보이지 않았다. 후드를 깊게 눌러 써 얼굴까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길거리 양아치가 아닐까 싶었다. 실제로도 살인현장에서 싸움을 벌이다 잡혀온 것이고, 이건 금방 끝나지 않겠는데.
태성은 한숨을 쉬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며 30분 쯤 전에 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번 일은 하태성 경위가 수고 좀 해줘야겠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위에서 명령이 들어와서 말이야. 최대한 빨리 사건을 종결짓고 피의자들 내보내게.”
실로 기가 막힌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꺼낸 당사자인 박 경감은 담배를 피우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은 태성이 느끼는 거부감과 같은 맥락일까? 확신할 순 없었지만 굳이 휘하 형사들이 아닌 경위인 태성을 부른 이유는 사건 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서의 과장씩이나 되는 박 경감이 직접 나설 순 없으니 그 바로 밑의 태성을 부른 것이겠지. 태성이 가볍게 통찰해내며 머리를 짚었다. 할 수만 있다면 거절할 것이다.
그렇지만.
“알겠습니다.”
태성이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 거절할 수 있는 명분도 없었고, 거절하면 더더욱 위태로운 입지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특히나 태성은 며칠 전 걸려온 권력자의 전화를 거절했던 적이 있는 것이다. 경찰 출신의 국회의원이라고 했던가. 그런 위치에 있는 권력자가 태성에게 전화한 목적이야 뻔했다. 더러운 뒷작업을 맡길 요량이었겠지. 그의 손을 잡으면 확실히 입지가 나아질지도 모르지만, 그 통화 중에 떠올랐던 것은 어머니의 실망하실 얼굴이었다. 그 때의 거절은, 다시 돌아보아도 잘 한 것이라 여겨졌으나 그에 따르는 불이익은 감수할 밖에.
피의자가 확실하게 범인인지 확인하고, 아니라면 빨리 종결짓고 내보내자. 그나마 윗선의 명을 잘 듣는 것이 태성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피의자가 협조를 해줬을 때의 이야기다. 몇 번이고 물어도 제대로 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태성은 머리가 다 아파왔다. 아까 전 박 경감이 피고 있던 담배라도 피고 싶을 지경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그의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름을 물었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비협조적으로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난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불리한 증언을 거부할 수 있고~ 맞지?”
“물론입니다. 불리한 증언을 거부하는 것은 피의자의 당연한 권리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필요한 진술조차 하지 않는 것은 피의자에게 대단히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살인현장의 살인범이 잡히지 않은 상태이니 피의자에게 혐의가 쏠릴 수도 있겠군요.”
“에이씨… 허건오라고 해.”
그제야 이름을 밝힌 피의자가 푹 눌러쓴 후드를 벗었다. 드러난 그의 얼굴은 굉장히 앳되어보였다. 고등학생 쯤 되었을까? 태성이 잠시 말을 멈추자 건오가 씩 웃었다.
“왜, 이렇게 귀엽고 잘생긴 남자 첨 봤어?”
“쓸데없는 말장난에 놀아줄 기분이 아니군요. 건오 씨, 나이는 어떻게 되십니까.”
말을 잘려버린 건오가 인상을 찡그린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화의 페이스를 제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 기분 나쁜 듯 보였다.
‘정말이지 번거로운 피의자로군.’
태성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제 방 천장 아래였다. 참새가 짹짹거리며 날아들고, 창문으로 햇빛이 환하게 비쳐드는 가운데 먼지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뿌연 시야를 어떻게든 해보고자 태성이 손을 아무렇게나 뻗어 안경을 찾는데 도무지 손에 집히는 것이 없었다.
평소 항상 안경을 머리맡에 두고 자는 것이 태성의 습관이었는데, 갑자기 오늘따라 멀쩡하던 안경은 어딜 갔단 말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태성이 남아있던 졸음기마저 몰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안경부터 찾고 늦은 아침이나마 어머니를 도와드려야 했다. 그리고….
안경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옆자리에서 오, 깼어? 하고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의 얼굴 위에 익숙한 물체 발견. 태성의 안경이었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어이가 없어 태성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상 외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오는 킬킬거리며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경찰나리, 의외로 시력 꽤 나쁜가봐? 이야, 역시 대학물 먹은 놈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지? 눈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어지러울 지경이야, 응?”
어지러우면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기가 막혀 건오를 노려보았지만, 아무래도 초점이 제대로 맞지를 않는다. 그것은 태성의 안경을 멋대로 쓴 건오도 마찬가지인지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건오는 이내 머리를 누르며 안경을 태성에게 돌려주었다.
“아오, 어지러워…. 이러다 내 잘난 시력 나빠지면 경찰나리 책임이야, 알아?”
노란 비니를 푹 눌러쓴 것이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었지만, 동네주민이려니 싶어 무심히 지나치려던 태성의 뒤에서부터 갑작스레 뻗어온 칼이 태성의 목을 위협했다.
“조용히 해, 내 말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당장 찔러버린다.”
칼을 목에 들이댄 채로 속삭이는 목소리는 명백한 협박이었다. 순식간에 자신이 인질로 잡혔다는 것을 간파한 태성이 몸을 뒤틀며 저항의사를 보였다. 하지만 제 목에 더 깊이, 피부가 살짝 베여 피가 날 정도로 칼을 목 가까이 들이대는 것을 보니 더 이상의 저항은 무리일 듯 했다. 태성이 움직임을 멈추자 등 뒤의 인물은 만족스러운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야지…. 얌전히 내 말만 들어주면 해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시라고.”
목소리는 오랫동안 뜀박질을 하기라도 한 듯 호흡이 거칠었고, 약간 쉰 듯도 들렸다. 그리고 잔뜩 낮추어진 목소리는 태성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아서,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숨기고자 하는 의도를 느꼈다. 물론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무언가를 하려는 것이면 비밀스러운 범죄일 것이 당연했지만, 태성의 머릿속엔 방금 골목길 초입에서 봤던 남자들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찾는 듯 보이는 수상한 패거리,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남자. 아무래도 그 패거리가 찾는 사람은 뒤에 있는 남자인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딘지 목소리가 익숙하군. 그리고 나보다 키가 작은 인물인가….’
태성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한 인물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었지만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태성은 자신의 통찰력을 믿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검은 정장의 남자들에게 제 등 뒤의 인물이 무엇 때문에 쫓기냐 하는 것인데….
“원하는 게 뭡니까.”
상대에 대한 분석이 끝났으니 굳이 제압하자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태성은 일단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판단하려면 좀 더 정보가 필요했다. 태성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건지, 그걸 파악할 정신이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순순히 원하는 것을 말했다.
“여기 살지? 날 좀 숨겨주셔야겠는데 말이야. 이상한 놈들이 나에 대해 물어보거든 모른다고 대답만 하면 돼. 간단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