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11. 03:49ㆍkrbs
정말... 차마... 황자라고만 달기엔 제가 양심에 찔려서ㅠㅠ
솔직하게 자황자 쪽이 맞지 않나 싶은데 일단 리퀘는 황자였기 때문에 저렇게 써둡니다.
급전개 주의, 캐붕 주의, 오글 주의, TS 주의, 아무튼 주의할 수 있는 건 다 주의해주세요.
이 봄에 왠 크리스마스인가 싶겠지만 처음 작성날짜는 작년 12월.... 19일이던가.. 암튼 9개월 빠른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3달 늦은 크리스마스입니다. 헤헤 지소님...사 사랑..ㅠㅠ
조심히, 살금살금.
종례도 다 끝나고, 귀찮은 청소도 대강 끝마쳤다. 무라사키바라는 가방을 집어 들고 발끝을 들었다. 조용히, 들키지 않게. 이대로 조금만 더 조심하면 된다. 이제 한발자국 남았다.
"어딜 가는 검까, 무라사키바랏치."
아, 들켰나.
어쩔 수 없네. 무라사키바라는 패배를 시인하며 발을 원래대로 돌려놓곤 뒤를 돌았다. 시선에도 소리가 난다면 분명 찌릿하고 울릴 듯 노려보는 소녀는 팔짱을 낀 채, 불만스레 볼이 부어있었다. 평소 모델이라고 거만하던 표정은 어디에도 없다. 삐져버렸나. 무라사키바라는 긴장감 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눈앞의 금빛 소녀 따윈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다만 귀찮을 뿐.
"정말 너무함다. 내가 할 얘기 있다고 그렇게 말했잖아요!"
빼액, 하고 소녀가 언성을 높였다. 또 시작이다. 청소가 끝난 다른 클래스메이트들은 이제 질렸다는 듯 자신의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무라사키바라와 소녀, 키세 료코를 피해서 슬금슬금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아~ 부럽다~. 나도 집에 돌아가고 싶고~. 무라사키바라 역시 불만어린 눈초리로 키세를 바라보았다.
"키세찡, 매일같이 그렇게 말하지만 별로 중요한 문제 아니었고. 나 우마이봉도 다 먹었으니까, 그만 집에 가고 싶은데~."
무라사키바라는 느긋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우마이봉이 다 떨어진 것은 정말이었다. 오늘은 체육 수업이 있어서였을까, 점심 도시락이 한참 모자랐다. 수업 중에 선생님께 들키지 않게 우마이봉을 먹는 것은 상당한 스킬이 필요했다. 그걸 뒷자리에서 다이렉트로 보고 들었던 키세 역시 알고 있을 텐데 여전히 퉁퉁 부은 채였다.
키세는 부루퉁한 얼굴로 가방을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휙 던졌다. 여자 농구부에 가입해보는 건 어떠냐고 권유하고 싶은 깔끔한 폼이었다.
"어라, 이거 주는 건가? 먹고 싶었던 맛인데. 고마워, 키세찡."
키세가 던진 건 크림스튜 맛 우마이봉이었다. 봉투 안에 제법 묵직하게 들어있었다. 무라사키바라는 솔직하게 웃는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한동안 쫓아다닌다 싶더니 무라사키바라의 취향을 외운 모양이었다.
무라사키바라는 봉투에서 우마이봉을 하나 꺼내서 뜯었다. 우마이봉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그 순간만큼 무라사키바라가 행복한 때는 없다고 해도 좋았다. 이제 조금은 키세의 말을 들어줄 용의가 생겼고, 무라사키바라는 한층 풀린 얼굴로 키세를 바라보았다.
키세는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조금 풀린 듯 볼에 바람은 뺀 채로 말했다.
"무라사키바랏치, 혹시 다음 주 화요일에 시간 있슴까?"
다음 주 화요일. 무슨 날이더라? 방학은 바로 내일이었다. 그리 활동적인 성향이 아닌 무라사키바라인 만큼 다음 주의 예정 역시 텅 비어있었다. 무라사키바라는 고개를 저었다. 별 일 없다는 뜻이었다. 봉투에서 새로운 우마이봉을 꺼내고 있는데 키세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음 주 화요일 저녁에 T역에서 어떻슴까. …아, 이번엔 정말로 모델 관련으로 일하라거나 그런 거 아니라고요. 좀 믿어요, 무라사키바랏치."
일전에 사람을 멋대로 불러내더니 제 매니저까지 대동하고 나타나서 모델 일을 해보라고 설득했던 일이 떠오른 건지 키세가 황급하게 덧붙혔다. 저 혼자 갈검다, 혼자서요. 무라사키바라는 여전히 의문스러운 눈길이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제 가슴에 안겨있는 묵직한 무게감 때문에 끄덕인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닐걸?
"알겠어, 7시쯤이면 되는 거지?"
무라사키바라의 승낙에 키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 역시 모델인가. 평소 꽤 귀찮다고 생각해왔지만, 저렇게 표정이 펴져선 숨김없이 미소짓는 것은 눈부셨다. 이제 해가 저물 무렵인데도 마치 대낮의 태양같이 밝은 느낌이었다. 그 미소가 무라사키바라가 키세를 싫어하지 못하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고맙슴다, 무라사키바랏치! 다음주 화요일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됨다, 정말로요!"
키세는 몇 번이나 무라사키바라의 손…엔 우마이봉 봉투가 들려있어서 무리였고, 무라사키바라를 껴안으면서 기뻐했다. 봉투를 껴안은 손에 살짝 스치는 키세의 가슴은 모델답게 꽤나 봉긋한 느낌이었다. 뭐 괜찮겠지, 하루 정도는. 같은 반 친구기도 하니까. 물론 무라사키바라의 기준에서 같은 반 친구에게 이정도 파격대우를 해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런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키세의 웃는 얼굴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의외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화요일, 저녁 7시. 무라사키바라는 다소 불만스럽게 볼이 부어있었다. 키세찡에게 속았어!
“에? 제가 뭘 속였다는 검까…?”
키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늘거리는 금발 머리카락이 키세의 움직임에 맞춰 춤을 추었다. 주위에서 감탄사가 높게 울렸다.
…결론만 말하자면 지금 무라사키바라와 키세는 사람들 사이에 가득 파묻혀있었다. 키세가 유명 모델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 주목의 대상이 되어버린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1. 키세가 패션쇼라도 나가나? 싶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왔다.
2. 그런데 만남의 장소가 유동인구가 많은 역전
3. 거기에 날짜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눈에 띄지 않으래야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한 키세는 태연한 표정이었지만 무라사키바라는 조금 질린 상태였다. 이 사이를 어떻게 헤치고 나가야 하나, 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보다 무라사키바라는 무대 체질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부담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모든 게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은 키세의 탓인 것만 같았다.
“에, 그치만 오늘 약속 없으니 괜찮다고 무라사키바랏치가 그랬잖아요. 전 딱히 거짓말은 안 했다고요.”
키세가 씩 웃었다. 잡지 속에서만 보이던 청초함과는 거리가 먼 장난기어린 표정에 사람들이 오오,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찰칵, 찰칵, 촬영음이 터지는 가운데 키세가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죄송해요, 사진은 찍지 말아주세요.
무라사키바라는 여전히 불만어린 표정이었지만, 키세 말마따나 몰랐던 것은 자신이긴 했다. 묘하게 속은 느낌이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무라사키바라의 손을 키세가 잡았다. …에?
“가요, 무라사키바랏치!”
죄송해요,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생긋 웃어 보이는 키세는 분할 만큼 예뻤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것이 당연할 만치. 길이 열리고, 뛰는 것에 가깝게 키세에게 이끌려가면서 무라사키바라는 생각했다. 정말 어쩔 수 없다고. 앞으로도 계속 키세찡에게 휘말릴 것 같다고.
* * *
가는 곳마다 시선이 집중된다는 사실을 제외하곤 나름대로 즐거운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무라사키바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딸기 스무디를 마셨다. 달아, 맛있어. 조금만 덜 추웠어도 파르페를 시켰을 텐데.
현재 무라사키바라와 키세는 저녁을 먹고 오락실에서 같이 스티커 사진을 찍은 뒤, 거리를 돌아다니며 아이쇼핑을 함께 했고,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주로 떠드는 것은 키세였고, 무라사키바라는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아무튼 믿을 수 없슴다.”
벌써 세 번째 나오는 얘기였다. 무라사키바라는 대답없이 빨대 끝만 물어뜯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세는 열을 올리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 나이 대 여중생이 화장품에 관심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슴까! 말도 안 됨다, 이건 하늘이 내린 피부에 대한 배신이라고요!”
없을 수도 있는 거잖아. 무라사키바라가 흘긋 제 옆에 쌓여있는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아이쇼핑 중 들른 화장품 가게에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화장품이 무라사키바라 옆에 가득 쌓여있었다. 키세가 무라사키바라한테 평소 무슨 화장품을 쓰냐고 물어봤다가 무라사키바라가 아무것도 안 쓴다고 대답한 결과였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니 어쩌니 했지만, 난 이런 것보단 과자가 더 좋은데. 하지만 이런 말을 꺼냈다간 믿을 수 없다. 를 4연속으로 듣게 될 것이다. 실제로 무라사키바라가 카페에 들어서면서 시킨 메뉴들에 키세는 불만을 토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열량이 높은 것만 먹으면서 왜 살도 안 찌는 거예요!”
키세의 목소리는 짐짓 억울하기까지 했다. 키세 자신은 시럽도 넣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는데, 무라사키바라는 딸기 스무디에 초코 쇼트케이크도 먹고 있었다. 중간 중간 계속 우마이봉을 비롯한 간식을 먹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글쎄…. 그보다 키세찡. 오늘 정말 무슨 일로 부른 거야?”
키세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눈을 굴리며 입을 삐죽이던 무라사키바라가 물었다. 도저히 더 이상은 못 듣겠다 싶어서 꺼낸 이야기이긴 했지만, 사실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을 때부터 줄곧 궁금했던 일이긴 했다. 모델 일의 제의가 아니었기에 수긍하고 나오긴 했지만 하릴없이 아이쇼핑이나 하거나 카페에서 수다를 떨거나 그런 평범한 여자아이들의 일상 자체가 무라사키바라에겐 생소했다. 그보다 키세와는 그럴 사이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고….
“에? 딱히 무슨 일은 없는데요.”
다행히 무라사키바라의 화제 전환에는 넘어가준 키세가 멀뚱히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도리어 의아한 기색마저 묻어있어서 무라사키바라가 다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 없다고? 그럼 왜 부르는 건데?
“왜 부르냐고요? 무라사키바랏치랑 제가 노는 것에도 이유가 필요함까?”
섭섭하네요, 하고 키세가 한껏 볼을 부풀렸다.
“하지만 키세찡은 나 말고도 오늘 같이 놀 친구는 많잖아. 그리고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고.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잖아.”
그리고 우린 굳이 말해 친구 사이가 아니다. 고 말할 만큼 무라사키바라는 배려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략된 말을 못 알아들을 만큼 키세가 멍청한 사람도 아니다. 키세는 조금 상처받은 듯 눈을 내리깔더니 이내 대답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무라사키바랏치를 부른 검다.”
“…에.”
“크리스마스 이브 쯤은 좋아하는 사람이랑 보내도 되는 거잖아요!”
무라사키바랏치 바보! 키세는 화가 난 얼굴로 울먹이며 자리를 박차곤 카페를 나가버렸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보내는 게 크리스마스 이브. 그리고 키세찡이 오늘 부른 사람은 나. …응?
무라사키바라의 귀끝이 빨개졌다. 키세가 열고 나가면서 닫지 않은 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차가웠다. 이건 고백…인거지? 어떡하지.
일단은 키세를 잡아야했다. 무라사키바라는 남아있던 초코 케이크 조각을 한입에 삼켜버렸다. 읍, 숨 막혀. 스무디까진 도저히 금방 못 마시겠고. 무라사키바라는 남아있던 짐을 주섬주섬 챙겨들고는 뒤쫓아나갔다. 유명 모델이니만큼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곳을 찾으면 금방 키세가 있겠지, 싶어 큰 초조함은 없었지만, 키세는 문 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가게에 방해될 것 같고.”
무라사키바라는 키세 옆에 주저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키세가 움찔하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왜요, 그보다 무라사키바랏치는 저랑 별로 같이 있고 싶지 않았던 거 아님까?”
“그렇게 말한 건 아닌데.”
“그 얘기가 그 얘기잖아요. 됐어요, 이런 날 불러서 미안해요. 난 알아서 갈 테니까 무라사키바랏치도 그만 집에 가도 됨다.”
키세는 여전히 우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가버리려는 키세를 무라사키바라가 잡았다.
“뭐임까.”
“아까 그거 말인데, 키세찡. 그거 역시 …고백인 거지?”
“그렇다면요.”
키세는 여전히 툴툴대고 있었다. 그렇게 저랑 같이 있기 싫은데 굳이 확인할 이유가 뭐임까. 무라사키바라는 아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거절당했다고 확정한 듯한 키세의 모습은 마치 어린애 같았다. 무라사키바라는 문득 웃음이 나왔다.
“난 키세찡이랑 같이 있기 싫다고 한 적 없고. 그리고 고백할 거면 좀 더 그럴 듯한 곳에서 해주면 좋겠고.”
홱 소리가 나게 키세가 뒤돌아서 무라사키바라를 보았다. 에, 그거, 그거.
“저기, 혹시 말임다. 무라사키바랏치.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거.”
천하의 키세가 저렇게 당황한 모습도 처음 보았다.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빠끔이던 키세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내가 싫지 않다고, 나랑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검까?”
무라사키바라는 긍정했다. 싫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이 북적이는 거리에서 만나는 것도, 전혀 흥미없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귀찮게 따라붙어도 화내지 않는 것도, 동성 간의 고백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도 전부 너라서.
키세 료코라서, 좋다고.
키세의 표정이 확 펴졌다. 방금 전까지 울먹이던 사람과 동일인물인지 의심될 만큼 밝은, 무라사키바라가 가장 좋아하는 그 표정이었다.
“고백은 내가 다음에 다른 장소에서 꼭 잘할게요! 아, 그,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정말 잘해 줄 테니까.”
그러니까 오늘 하루는 더 나에게 빌려주세요. 무라사키바라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너와 함께라면 좋아.
묘한 기분에 올려다본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소녀들이 마주보며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말을 잊었네.”
의아해하는 키세의 귀를 잡아당기며 무라사키바라가 소근거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료코찡.
Fin.